On the journey of
[뉴스레터] 4월 3일 뭐지?뉴스레터 본문
소리 없는 목소리들 : 누칼협 시대의 대자보
저자 김스피
(Authors) Kim, Supi
출처 인스피아 저널, (120), 2024.4.3, 1-8 (8pages)
(Source) Journal of the Inspia
키워드: 말, 은닉대본, 대자보, 사회, 누칼협
1.머리말
2.‘생각풍선’은 힘이 세다? : <은닉 대본>
3.다만, ‘혼자 생각풍선’은 힘이 없다 : 고립된 ‘나’들
4.투표권은 시작 : ‘진짜’ 멋진 신세계를 위하여
5.맺음말
【1.머리말】
안녕하세요.
느릿하게 해찰하며 걷는 것을 좋아하는 김스피입니다.👤
바야흐로 ‘말’의 계절입니다.
오는 10일 총선을 앞두고 하루가 바쁘게 정치권에서 다양한 뉴스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연일 인터뷰, 공방들이 이어지고 있고요. 그런데 그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지난 한주를 돌이켜본다면 인상 깊었던 ‘장면’은 소리가 없는 목소리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대자보들입니다.
지난달 21일 처음 유정씨(이태원 참사 유가족), 이철빈씨(전세사기 피해자) 등 2030 유권자 4명이 붙인 대자보를 시작으로, 곳곳의 대학에도 대자보들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큼직한 글자로, 조금은 서툴지만 적어내려갔습니다.
“저는 억울합니다” “두렵습니다” “부끄러웠습니다”...
지난 21일, 이태원 참사로 동생을 잃은 유정씨가 대자보를 써서 들어보이고 있습니다. 동국대에 붙은 익명의 화답 대자보. "대자보를 보고 무어라도 써야할 것 같아 무작정 종이를 사고 펜을 들어보았다"며 "우리의 작은 행동이 더 큰 날갯짓이 될 수 있도록 투표하자"고 권하고 있습니다. / 경향신문, 오마이뉴스
이젠 대학가 앞에도 얼마 남지 않은 문방구를 돌아다니며 어색할만큼 커다란 종이와 매직펜을 사서 종이에 글자를 적는 마음을 떠올려봅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손글씨조차 쓰지 않는 스마트폰 시대에도, 여전히 ‘대자보 같은 것’을 통해서 밖에 말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가 있구나...’
문득, 물음표가 떠오릅니다. 과연 오늘날(자기 어필의 시대, SNS의 시대) 진짜로 우리에게 절박한 문제, 고민, 두려움, 막막함 등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를 하고 있긴 한 걸까요? 그런 이야기들은 정말로 들어야 할 사람에게 제대로 가닿기는 커녕, 동료나 주변 사람에게조차 털어놓고 위로받지 못하는 건 아닐까요.
그렇다고 한다면 - 정말로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은 ‘하고 싶은 말, 할 말 다 하며’ 자유롭게 살고 있다고 할 수가 있는 걸까요?
*
한동안 ‘누칼협’이라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모든, 누군가 슬퍼하는 이야기에 ‘누가 칼들고 협박했냐’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우리는 아무에게도 스스로의 피해, 두려움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없었습니다. 모두 자신의 책임이니까요. - 버스 기사가 된 것도, 하청업체에 취직해 위험한 직무에 종사하다 산재 사망한 것도, 이태원에 그날 놀러간 것도, 교대에 가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다는 꿈을 품게 된 것도, 부당하게 해고된 것도, 사기를 당해 마음이 무너진 것도...
우리는 왜 그간 우리의 두려움을 툭 터놓고 이야기하지 못했을까요? 선거도 중요하지만 평소 이런 우리의 속내를 허심탄회하게 공유하고 서로 의지할 수는 없는 걸까요?
물론 이런 고민들은 아주 큰 고민들입니다만. 여느때처럼 책을 지팡이 삼아 본다면 이런 고민들에 대한 약간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지배, 그리고 저항의 예술-은닉 대본>(제임스.C.스콧), <다시 찾아본 멋진 신세계>(올더스 헉슬리) 등을 지팡이 삼아, 오늘날 우리의 ‘말’에 대해 해찰해보겠습니다.
【2.‘생각풍선’은 힘이 세다? : <은닉 대본>】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조차 ‘권력을 향해 진실을 말하다’라는 표현에 유토피아적인 느낌이 남아있다면, 그것의 확실한 이유는 실제로 그런 일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이다. 권력자의 면전에서 이루어지는 약자의 가식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나 있는 일이다.”
-제임스. C 스콧 <지배, 그리고 저항의 예술-은닉 대본>
Roseanne 연구자님은 “할 말 다 하고” 사시는 편인가요?
조금은 뜬금없게 느껴질 수도 있을 질문인데요. 오늘날 우리는 흔히 표현의 자유가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고 여겨왔습니다. 하지만 그 표현의 ‘내용’에 대해 곰곰 생각해봅니다. 정말 그럴까요?
여전히 ‘진짜로’ 필요한 말을, 해야할 곳을 향해 “정면에서” 말하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입니다. 예를 들면 오늘날에도 일터에서 처우에 관한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했다간 해고를 당하거나 블랙리스트에 오를 각오마저 해야합니다. 상사 등 윗사람에게 솔직한 의견을 내는 것조차 힘들고, 심지어 사고가 우려되어 직원이 작업중지를 요청했더니 회사로부터 손해배상 청구를 받기도 했습니다.
과거 한 인터뷰에서 20대 노동자는 “흔히 MZ세대는 직장에서 할 말을 다 하고 산다는 이미지가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링크)”고 답답해하기도 했습니다.
“뒤에서도” 마찬가집니다. 설령 회사에서 부당 대우를 받거나, 나만 취업이 끝없이 늦어지는 것 같고, 나쁜 일을 당하고, 경력단절 때문에 힘들고, 사는 것이 막막한 얘길 주변에라도 털어놓고 싶어도 결국 ‘노오오력’이 부족한 내 잘못 같아 주눅들고 침대에 누워 등이 꺼져드는, 세상에 혼자 뿐인 기분을 느끼게 됩니다. 결국 내가 ‘스스로’ 해결할 밖에 없으니까요.
이럴 때 과연 우리 시대는 할 말을 다 하고 사는, 자기 표현의 시대라고 할 수 있을까요?
*
예일대 정치·인류학 교수인 제임스 C. 스콧의 <지배, 그리고 저항의 예술-은닉 대본>(이하 <은닉 대본>)은 농민, 일꾼, 노예 등의 복잡한 ‘이중생활’을 다룬 흥미로운 벽돌책인데요.
이 책의 핵심 메시지는, 다음과 같이 간추려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옛날부터 농민, 하인 등은 고분고분한척하면서도 지배자들의 눈을 피해 ‘무대 뒤에서’ 투덜거리거나 잔뜩 화를 냈다. ㅡ 그런데 이런 ‘무대 뒤’ 불평은 단순히 투덜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오래오래 모이고 쌓여 사회를 바꾸는 대단한 힘이 되어왔다!”
학제를 넘나드는 통찰력으로 유명한 예일대 정치학, 인류학 교수 제임스C.스콧 (왼쪽) <지배, 그리고 저항의 예술-은닉 대본> 책, 표지 그림은 케테 콜비츠의 <직조공 봉기> 연작 중 가난에 지친 독일 슐레지엔 직조공들이 저항을 모의하는 장면을 담은 그림입니다. / Gastronomica, 후마니타스
*
우선, ‘은닉 대본’이란 무엇일까요?
스콧에 따르면, 노예, 하인 등 지배를 받는 사람들이 권력자의 눈을 피해 뒤에서 ‘몰래’ 하는 반항적인 투덜거림이나 행동(게으름피우기 등)을 뜻합니다.
예를 들어, 양반과 말뚝이(하인)가 나오는 탈춤 대목을 떠올려보면 이해가 비교적 쉬울텐데요.‘양반 나리’ 앞에선 시침 떼고 공손한 척을 하다가, 양반이 으쓱해지면 뒤에 가선 익살을 부리며 마구 놀리는 거죠. 물론 탈춤에선 사람들의 설움을 풀어주기 위한 해학이 주가 되지만, 그 아래엔 분노나 슬픔, 하소연 등도 담겨있을 겁니다.
여기서 양반 앞에서의 말뚝이 행동을 ‘공개 대본’, 양반 뒤에서의 행동을 ‘은닉 대본’이라고 할 수 있고요.
혹은 만화로 생각해보면 공개 대본은 ‘말풍선💬’, 은닉 대본은 ‘생각풍선💭’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이하 ‘은닉 대본’을 생각풍선이라고 적어보겠습니다.1)
제가 오늘 이 책을 레터에서 함께 읽어보기 위해 가져온 이유는, 이 책이 알쏭달쏭한 ‘목소리 내기’에 대한 섬세한 이야깃거리를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
저는 <은닉대본>을 곰곰 읽으면서, 두 가지 포인트에 특히 집중해 보았습니다.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생각풍선’은 힘이 세다 : ‘생각풍선’이 쌓이고 모이면 폭탄이 된다!
2. 다만, ‘혼자 생각풍선’은 힘이 없다 : 외롭다
우선, ‘생각풍선은 힘이 세다!’는 이야기에 대해 살펴봅니다.
얼핏 ‘생각풍선’은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정작 반항해야 할 사람 앞에선 ‘찍’ 소리도 못하고, 꿍쳐뒀다가 뒤에서만 투덜거리기 때문이죠.
하지만 위에서 이 책의 핵심 내용을 살펴보았듯, 저자는 생각풍선의 ‘굉장한 잠재력’에 주목합니다 - ‘투덜거리는 마음도 쌓이고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끼리 공유되다보면 언젠가는 바깥으로 폭발하는 순간이 오고, 그 연쇄적인 힘이 사회를 바꾸는 굉장한 동력이 되기도 해왔다’는 거죠.
저자는 이 책에서 한 소설(조지 엘리엇, <아담 비드>)에 등장하는 소작인 포이저 부인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는데요. 악덕 지주의 땅에서 농사를 짓다가, 높은 소작료와 부당한 계약을 더이상 참을 수 없어진 포이저 부인은 결국 참다참다 ‘폭발’하죠.
”어르신은 어떻게 하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지 그 방법만 찾아 계속 머리를 쓰고 계시죠? […] 저 혼자만이 본심을 말하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 지주 어른의 계획은 포이저 부인이 ‘참고 사는 것’을 거부함에 따라 수포로 돌아갔으며 […] 아마 이들(이웃들) 모두는 그전부터 계속 지주 어른에 대해 같은 말을 해오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 포이저 부인을 동네의 영웅으로 만든 것은 그 말을 지주어른의 면전에서 공개적으로 했다는 점이다 […] 포이저 부인은 권력을 향해 진실을 말한 것이다.
-제임스 C. 스콧, <지배, 그리고 저항의 예술 - 은닉 대본>(이하 동일)
참고 또 참으며 ‘생각풍선’에만 불만을 담아두었던, 포이어 부인은 최악의 경우 ‘거리에 나앉을 위험’을 감수하고 진심을 말했고요. 주변에선 포이어 부인과 같은 처지인 소작인들이 바라보고 깜짝 놀라고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문득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며 최근 서울 버스 파업 호소문(링크)이 떠오르기도 했는데요. “고작 돈 몇 만원 갖고 벌벌 떤다”는 말을 기사들은 모욕과 부당 조건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졌고, 모여서 진짜 목소리를 내게 된 것입니다.
지난달 26일 파업 관련 투표를 진행하고 있는 버스 노조 조합원들 (왼쪽·링크) '생각풍선'은 얼핏 별것 아닌 투덜거림, 한숨 정도로 보이는데요. 제임스 C 스콧은, 생각풍선(은닉 대본) 속 불만, 저항, 화들이 서로 쌓이고 공유되면서 역사의 커다란 변화의 물결을 만들어왔다고 주장합니다. / 경향신문, dreamstime
여기서 핵심은 단순히 요구를 받아들였다가 아니라, 그 순간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사람들 - 그 소식을 들었던 사람들이, 포이저 부인과 똑같은 ‘생각풍선’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죠. 이에 사람들은 ‘속 시원함’을 느끼고, 자신도 이야기를 할 ‘용기’를 얻게 됩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다른 대자보에 용기를 얻어 자신도 왠지 모르게 대자보를 쓰게 되었다는 이야기들이 떠오르기도 했는데요.2)
저자에 따르면 실제로 과거엔 이처럼 서로 불꽃이 튀면서, 단지 개인의 처우를 개선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혁명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네요.
저자는 갑자기 맨바닥에서 혁명이 뿅 생기지 않는다며, 이처럼 하층민들이 평소 모여서 자신의 처지를 고민하고 토로하고 반항심을 드러내고, 많이 먹고 즐겁게 놀 수 있는 유토피아를 구체적으로 꿈꾸는 과정에서 사회적 변화의 토양이 마련되어 왔다고 주장합니다. 이 아이디어가 <은닉 대본>의 가장 독창적인 부분이고요.
* “이중적 생활은 이중적 언어와 이중적 생각을 탄생시킬 뿐만 아니라 마음을 가식 혹은 반역, 그리고 위선 혹은 급진주의 쪽으로 부추긴다”(두 보이스)
* 반란이 결코 일어날 법하지 않던 북미 노예제에서조차 놀라운 것은 실제로 반란이 발생했다 [...] 어떻게 하여 이와 같은 피지배 집단들이 그렇게 자주 그들에게 주어진 상황이 불가피한 것은 아니라고 믿었을까? […] 확실한 것은 대규모 반란들이 근대 이전에 실제로 발생했을 때 천년왕국에 대한 믿음과 희망이 가장 중요한 이데올로기적 동원 기제를 제공했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아주 힘들 때조차도 함께 모여서 ‘생각풍선’을 풍부하게 부풀렸습니다. (유토피아에 대한 망상, 민담, 뜬소문, 위로, 욕하기, 잔뜩 취하기, 딴짓…),
모여서 화도 냈고, 꿈도 꾸었습니다.
특히 피터 버크는 심지어 16~19세기에 ‘교회’의 경쟁 관계로 ‘싸구려 술집’을 꼽을 정도였다고 하네요. 그만큼 싸구려 술집이 해방, 저항, 놀기, 위로의 공간으로서 민중들에게 중요한 역할이었다는 거죠. 이 때문에 역사적으로 지배계층은 시장, 헛간, 싸구려 술집 등 하인들이 세명 이상 모이는 것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고 하네요.
자연히 머리에 한 질문이 떠오릅니다.
오늘날은 과연 그런 ‘사회적 공간’이 있을까요?
(애초에 모여도 그런 솔직한 얘기를 안할 것 같습니다만.)
여하튼 이 질문은 두번째 대목(“혼자 생각풍선은 힘이 없다!”)으로 이어집니다.
✏️
“그들은 그녀의 일장 연설 속에서 진정으로 자신들을 발견했고, 그녀는 진정으로 그들을 대변했다[...]최초의 선포가 다른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말한다는 것은, 오랫동안 소곤거려야 했고, 억제해야 했고, 참아야 했고, 억눌러야 했고, 숨겨야 했던 것을 마침내 고함치며 말하는 것이다.”
-제임스 C.스콧, <지배, 그리고 저항의 예술-은닉 대본>
1) 좀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뒷담, 소문, 민담 등의 ‘말’ 뿐 아니라 의도적인 게으름부리기, 탈세 등의 행동도 은닉 대본에 해당합니다만 일단 이번 레터에서는 ‘말’에 집중하였습니다.
또한 '은닉 대본'이라는 단어는 저자가 직접 만든 개념어로, 담긴 의미가 난해하진 않으나 짧은 레터의 맥락 안에선 다소 어렵게 다가올 수 있을 것 같아, 직접적으로 저자의 말을 인용하는 부분이나 오해의 위험이 있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직관적으로 의미가 통하는 '생각풍선'이라는 단어로 대체해보았습니다. 관련해서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는 <참고문헌>을 참고해주셔요.
2)실제로 과거 <안녕들 하십니까?> 당시의 대자보나, 근래 붙고 있는 대자보들을 직접 읽어보면, 이처럼 다른 사람의 대자보를 보고 '용기를 얻었다'고 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3.다만, ‘혼자 생각풍선’은 힘이 없다 : 고립된 ‘나’들】
이처럼 제임스 C 스콧은 이같은 생각풍선의 ‘상상치 못한 위력’에 주목하는데요.
그런데 연구자님들은 아마 위의 내용을 읽으시면서 이런 생각이 드셨을 수 있습니다.
‘정말 그렇군...그런데 이런 얘기는 오늘날 대부분의 직장인 등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일까?’
오늘날 직장인들의 생각풍선이라고 했을 때 떠오르는 건 대체로 ‘출근 싫어 짤’ ‘퇴사짤’ 정도니까요. 그렇다면 이런 생각풍선들도 모이면, 포이어 부인의 외침처럼 큰 위력이 있는 걸까요?
물론, <은닉 대본> 책이 1990년 미국에서 출간된 책이기도 하고 주로 20세기 이전의 역사적 상황들을 다루고 있어, 결국 이 질문에 대해 궁리하는 것은 ‘2024년 버전 해찰쟁이’인 저의 몫이었는데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오늘날의 생각풍선은, 대부분 ‘혼자 생각풍선’이라서 위안도 크지 않고 힘도 적다”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아래에 그 판단의 이유에 대해 간결히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실은 '은닉 대본'이라는 말을 접하자마자, 그리고 <은닉 대본> 책을 읽는 내내 '퇴사짤'이 머리에서 계속 맴돌았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책을 덮고 나서 저는 퇴사짤은 '은닉대본'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요. 왜냐면 결국 이는 '저항'이라기보단 문제의 책임/해결을 오롯이 자신에게만 두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와는 생각이 다른 분도 계실 수도 있다곤 생각합니다만 오늘날 우리는 대체로 각각의 '칸'에 들어가 서로 교류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 인터넷커뮤니티, Unsplash
*
책을 읽다보면 - ‘은닉 대본’이 실제 효력을 갖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공통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이 어느정도는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공통의 문제, 저항에 대한 것이어야한다는 것이죠.
조금 알쏭달쏭할 수 있지만, 일단 투덜대려고 해도 상대방이 ‘문제’에 전혀 ‘공감’하지 못한다면 ‘대화’ ‘끄덕임, 전파’는 일어날 수 없으니까요.
실은 제가 이 책을 읽으면서 제일 깜짝 놀라고 이상한 독서 경험을 한 대목은, 바로 제임스 C 스콧이 ‘반항’이 절대 발생할 수 없는 사회의 조건에 대해 이야기를 한 부분이었습니다. 즉, 다르게 말하면 은닉 대본이 결코 생겨날 수 없는 조건이라고도 생각해볼 수 있을텐데요.
두 가지 조건을 추려보자면, 다음과 같고요.
1. 사다리의 환상 : “우리는 모두 언젠가 ‘저 자리’에 오를 수 있어!”
2. 완벽한 고립 : 결코 모두 서로 진심을 털어놓지 않는 사회
아래에 관련 대목을, 차례로 짧게 발췌해 옮겨보겠습니다.
* “현재 감내하고 있는 지배를 언젠가 자기 자신도 행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지배의 정당화 패턴에 순응하게 되는 강력한 유인이다. 그것은 인내와 추종을 고무한다 […] 전통적인 중국의 며느리는, 만약 그녀에게 아들(!)이 있다면, 스스로 군림하는 시어머니가 될 날을 기대할 수 있다.”
* “힘겹고 비자발적인 복종은 정당화될 수 있다. 여기서 관건은 상대적 언설의 자유를 보장하는 일체의 사회적 환경을 절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피지배자들 사이에 은닉 대본이 생성될 만한 사회적 조건을 거세하는 것이다 […] ”고독이야말로 완전한 항복의 기본적 조건이다(미셸 푸코)” ”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며 고개를 여러번 끄덕이고 밑줄을 그어갔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상황과 너무 거울처럼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죠. 그러던 중, 저는 연필을 손에 쥔 채 두번째로 깜짝 놀라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저자는 이런 대목을 설명하고는 겸연쩍게 덧붙였기 때문이죠. ‘나도 알아. 이런 조건은 너무 비현실적이긴 한데 말야...’
* “복종을 합리화하는 사회적 구성을 받아들이거나 정당화하게 되는 제한적이며 엄격한 조건들...”
* “(누구도 서로 소통하지 않는 채 완전히 격리된) 궁극의 전체주의적 환상은 실제 어떤 사회의 전반적인 상황에도 근접하지 않는다 [...] 아마도 몇몇 형무소, 정신 개조 캠프, 정신 병동 정도에서 여기서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잠깐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이런 대목을 쓰면서도, 설마 이런 일이 실제 있을라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모습과 완전 똑같은데요.
이런 대목들을 읽다보니, 저는 16~19세기의 농민, 하인들이 마치 오늘날 저를 향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렇게 묻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
“아니, 당신의 세상에선 모두가 힘들어하는데 자기 탓만하고 불만을 갖긴 커녕, 각자 끙끙 앓고 주변에도 자신의 힘듦을 털어놓기 어렵다고요? 정말이예요? 어떻게 그렇게 버티고 살죠? 사람은 애초에 혼자서 살 수 있는 완벽한 존재가 아니고, 당신의 그 고민은 당신 탓이 전혀 아닌데요...”
*
또한 ‘고립’과 관련해,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 과거 공동체가 견고한 사회에서는 장례 등 대소사, 품앗이, 돈 빌리기, 자녀 교육, 결혼 등이 모두 공동체 안에서 서로에게 의존하며 이루어졌기 때문에 서로간의 유대가 강했고, 이 때문에 사람들은 지배계층에 대항하는 힘을 갖게 되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피지배집단 내부에서 발생하는 권력관계는 종종 위로부터의 행동 결정에 대한 유일한 대항력이 된다 [...] 안달루시아 지방의 어떤 농부도 최저임금 이하로 일할 엄두를 감히 내지 못했다고 한다. 만약 그랬다가는 냉대받거나 배척당하기 일쑤였으며 ‘저질’ 혹은 ‘얼간이’라는 낙인이 찍히기도 했다 [...] 이런 압력은 피지배자들의 내부 이견을 억제할 뿐만 아니라 제각각 지배자 앞에서 눈먼 경쟁을 충동적으로 벌이는 일 -만약 피지배자들이 그런 식으로 행동한다면 모든 것을 다 잃어가는 가운데 지배 권력에만 좋은 일을 시키는 꼴이 되고 만다-을 통제하는 데도 효과적이다.
오늘날은 서로에게 의존할 필요조차 없기 때문에, 오직 상사의 눈치를 볼 뿐이죠. 그 와중에 무한 경쟁으로 인해 각자 더 가혹한 노동 조건을 그저 감내하는 경우도 많고요.
*
물론 그 시절의 하인, 소작농들에 비해 오늘날 사람들의 처우가 나빠졌다고 말할 순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일단 직장 이동의 ‘자유’가 있고, 회사를 그만 둘 ‘자유’, 부당함에 반발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어 있긴 합니다. 일단 그게 현실의 차원으로 왔을 때, 얼마나 실효성이 있는지는 둘째 치고라도요.
다만 저는, 적어도 과거엔 서로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끼리 불만을 토로하고, ‘네 탓이 아니야’ ‘엉망진창이군’ ‘무엇이 잘못일까?’ 등의 진심, 두려움, 불만들을 허심탄회하게 나눌 수 있는 공동체에 소속되어왔다는 점, 미약하게나마 서로 돕고 힘든 사람들도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든 의존하며 버틸 수 있었다는 점, 하지만 오늘날은 그러지 못하다는 점이 이 책을 읽는 내내 마음에 아프게 닿았습니다.
오늘날 불만은 방향을 잃고 결과적으로 각자 자신을 향하고 찌를 뿐인데요(=누칼협)
이유는 누구나 마음만 ‘제대로’ 먹으면 성공할 수 있고, ‘남탓’ 을 하고 투덜대는 것은 결국 자신의 무능함을 보여주는 일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요.
【4.투표권은 시작 : ‘진짜’ 멋진 신세계를 위하여】
이상, 결국 우리는 평소 “할 말 다 하고” 사는 것 같지만 핵심에 대해서는 입을 닫고 아주 쓸쓸하게 살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고요.
그렇다면 그 쓸쓸함을 없애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할까?의 실마리도 어느정도는 잡힌 것입니다. 우리가 ‘공동으로’ 모여서 떠들어야 한다는 거죠. 민주주의에서 투표는 굉장히 중요하지만, 이와 함께 우리가 떠드는 것도 필요한 것입니다.
*
마지막으로, 짧게 살펴보고 싶은 책은 올더스 헉슬리의 <다시 찾아본 멋진 신세계>입니다. 이 책은, 올더스 헉슬리가 1932년에 <멋진 신세계>3)를 집필한 뒤, 27년 뒤 1958년에 발표한 ‘평론집’인데요. 10개 정도의 꼭지의 칼럼들을 통해 당대의 문제를 짚고, 미래를 예측한 흥미로운 책이죠.
<멋진 신세계>는 ①소마 알약, 세뇌교육 등으로 모두가 행복한 세상 ②태어나면서부터 유전적으로 정해진 계급(알파, 베타...엡실론) 등의 설정으로 유명한 소설입니다. 27년 뒤 헉슬리가 쓴 <다시 찾아본 멋진 신세계>.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더 빨리 '멋진 신세계'가 왔다고 놀랍니다. / Harper Collins, 소담
올더스 헉슬리는 이 책의 절반 정도의 분량을 들여 다양한 최신식 설득의 기술(프로파간다 등)에 대한 논평을 하고 있는데요.
이 책을 읽으며 제 눈에 유독 꽂혔던 부분은, 아무래도 ‘사회적 공동체’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헉슬리가 그려낸 <멋진 신세계>에서 실은 ‘투표’란 있을 수도 없는 것이었지만, ‘자유’를 위해서는 당연히 투표가 필수고요.
그러나 헉슬리는 투표는 그저 시작일 뿐, 우리가 실질적으로 민주주의 사회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가 지속적으로 우리 삶과 관련된 중요한 이야기들을 나누어갈 사회적 공동체의 존재가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투표할 권리를 살펴보자. 원칙적으로 그것은 대단한 특권이다. 실제로는 최근의 역사가 반복해서 보여주었듯이, 투표권 자체는 자유에 대한 아무런 보장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만일 국민 투표에 의존하여 독재 정치를 피하고 싶다면, 단순히 기능적인 집합체에 불과한 현재 사회를 스스로 통치하고 자발적으로 협동하는 집단으로 분할하여 대기업과 큰 정부의 관료적인 체제를 벗어나 사회가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는 능력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
인구 과잉과 조직 비대화는 현대의 대도시를 이룩해놓았고, 그 안에서는 다수와의 개인적인 관계를 통한 충분히 인간적인 삶이 거의 불가능해졌다. 따라서 […] 대도시를 인간화 시켜야한다.
-올더스 헉슬리, <다시 찾아본 멋진 신세계>
헉슬리에 따르면 - 이런 요소가 충족되지 않는다면, 사실상 투표권은 있으나 마나한 것이 될 뿐입니다.
정치인들은 쉽게 기만적인 정책을 내놓고, 이미지 정치 등 선동을 통해 표를 얻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진정 많은 사람들이 행복한 사회가 되기 위해선 - 사람들이 모여 정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평소에도 꾸준히 이야기하고, 권력자들을 감시하고, 또 우리의 ‘진짜’ 문제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공동체에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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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is custodiet custodes?감시자는 누가 감시하는가?” -유베날리스, 풍자시집
【5.맺음말】
‘과연 오늘날 우리는 제대로 말하고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시작한 오늘 레터의 결론은, 결국 ‘공동체’에 대한 고민으로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았는데요.
아마도 ‘말’이 진짜 효력을 갖기 위해선, 기본적으로 상대가 필요하기 때문이겠죠. 말도, 사회도, 정치도 - 결국은 혼자가 아닌 여럿이 모여 이루어지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모이지 않게 되었고, 서로를 향해 진짜 말을 숨기게 되었고, 그렇게 각자 외롭게 슬퍼하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근래 2013년의 대자보들을 모아둔 책 <안녕들 하십니까?>(링크)를 펼쳐 이리저리 읽다가, 유독 와닿은 대자보가 있었습니다.
그는 묻고 있었습니다. 과연 이곳에 ‘사회’가 존재하긴 하냐고요.
“지금 이곳에 ‘사회’가 존재하긴 합니까? 우리는 우리의 삶을 ‘함께’ 영위하고, 짐을 ‘함께’ 짊어지고, 서로를 ‘함께’ 위로하고, ‘함께’ 놀고, 정치를 ‘함께’ 해나갈 공간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사회를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애초에 우리는 사회를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사회를 가져본 적 없다면 정치를 통해 사회를 만들면 됩니다. 정치는 그 자체로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내는 일입니다 […]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물음을 통해 우리는 미력하나마 서로의 얼굴을 보고 안부를 묻게 되었습니다. 대자보로 안녕하지 못한 이유를 말하고 그에 대답하게 되었습니다 […] 결국 우리 모두는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물음을 통해 이미 정치의 첫 걸음을 내딛은 셈입니다.”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 <안녕들 하십니까> 中 (승우, 「‘사회’ 없는 시대의 ‘정치’」)
그의 질문은 여전히 오늘날의 우리에게 남은 숙제입니다.
*
연구자님들도 오는 총선에서 소중한 한표를 잘 행사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는 앞으로도 꾸준히 ‘할 말’을 고민해가야겠습니다.
누칼협이라는 말 대신, 우리의 ‘진짜’ 말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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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젊은이는 늘 멍에를 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런 개인 의견 없이 멍에를 짊어지고 사는 이가 과연 있을까?”
-조지 엘리엇, <미들 마치>
※레터를 쓰며 읽은 책, 이 주제에 관심이 있으신 독자들이 추가로 읽을만한 서적 등을 추천합니다.
제임스 C. 스콧, 전상인 옮김, 『지배, 그리고 저항의 예술- 은닉 대본』, 후마니타스, 2020.
-다양한 학제를 넘나들며 유려한 글쓰기를 하는 것으로 알려진 정치, 인류학자 제임스 C 스콧의 책입니다. 오늘 레터 본문에서도 간추렸듯이, 이 책의 핵심은 '은닉 대본은 단순히 투덜거림이 아닌 - 사회를 바꾸는 변혁의 조건이다'라는 것인데요. 책의 내용 자체는 직접 차분히 읽어내려가면 전혀 난해하진 않은데, 아무래도 '은닉 대본' '공개 대본' 등의 용어가 낯설다보니, 사용되는 단어들 가운데 다소 낯선 용어들이 많다보니 레터로 다루자고 판단했을 때 조금 고민을 하긴 했습니다. 균형있는 독해를 위하여 해당 논문(링크) 및 해외 사이트의 서평들을 참고하였습니다.
오늘 레터에선 너무 넓은 문제라, 직접 언급하진 않았습니다만 - 읽는 내내 실은, 퇴사짤이라든지 커뮤니티 사이트의 하소연, 썰(?) 등 역시 전통적인 은닉 대본과는 다소 거리가 있을 수 있어도 아예 의미가 없다고 할 순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긴 했는데요. 이어 과거의 '싸구려 술집'을 오늘날엔 어느정도 블라인드라든지 커뮤니티 사이트, 카페 등이 대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만 왠지 썩 내키지 않아 알쏭달쏭한 상탭니다. 혹시 이 책을 읽어보신 분이 있거나, 나중에라도 읽으실 분이 계신다면 이런 주제와 관련해 추가로 의견을 나눠보고 싶네요.
올더스 헉슬리, 안정효 옮김, 『다시 찾아본 멋진 신세계』, 소담, 2015.
-이 책은 우연히 서가에서 발견하여 근래 흥미롭게 읽은 책입니다. 레터의 본문에도 적었듯, 이 책은 올더스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 소설을 쓴 27년 뒤에 발표한 논픽션 칼럼집이고요. 그는 자신의 예상보다도 '멋진 신세계'가 불과 수십년만에 '훌쩍' 다가왔다는 것에 깜짝 놀랍니다. 그리고 이 책의 거의 후반부 절반정도를 들여 '수면 세뇌, 최면, 프로파간다...' 등과 관련된 이야기를 다루는데요. 그중 어디까지 오늘날 유효하다고 볼 수 있을진 잘 모르겠습니다만, 확실히 그가 '진정한 자유'를 위해선 반드시 정신을 바짝 차린 시민들, 함께 모인 시민들의 존재가 필요하다고 강조한 부분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 『안녕들 하십니까?』, 오월의봄, 2014.
-'대자보'라고 한다면 역시 약 10년 전인 2013년, KTX 승무원 대량해고 사태-이와 관련된 고려대 주현우씨의 대자보를 계기로 우리나라를 강타했던 '안녕들 하십니까?' 열풍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겠죠. 이 책은 약 반년 간 각지에서 주현우씨의 대자보 이후 서로의 안부를 물었던 이들의 대자보를 엮어둔 책입니다. 당시 기사들을 꽤 인상적으로 봤음에도, 실제 책으로 대자보의 본문들을 읽다보니 새로운 느낌이 들기도 했고요.
한편, <안녕들 하십니까?>와 요새의 대자보에서 보인 인상적인 차이라고 한다면 - (엄밀한 분석은 아닙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전자의 경우 '타인의 고통과의 연대'에 중심이 가있다면 후자는 '자신의 고통, 불안을 토로'하는 것에 중심이 가있다는 점이 눈에 띄었습니다.
【글 속 한 문장🖍】
👤주제에 대해 더 읽을 만한 글들을 골랐습니다. 각 사진을 누르면 글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나는 1인분의 삶을 살고 있지 못합니다
영상(약 18분)
🖍글 속 한 문장
“실제로 취업에 실패한다고해서 모두가 은둔하지는 않거든요. 은둔의 이유는 세상에 존재하는 방의 숫자만큼 다양하다...원해서 그렇게 사는 사람은 없어요...사실 그런 실패를 해도 괜찮지만 워낙 혼자 생각하는 데 익숙해져있기 때문에, 어떤 분이 댓글을 그렇게 달았더라고요. '집 안에 있으면 생각을 천장만큼만 하게 된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5년 이상 미취업 상태인 30대 무직자들의 이야기를 들은 씨리얼 영상입니다. 이들은 "나는 지금 1인분의 삶을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모두 'X'를 그렸는데요.
하지만 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면, 이들이 무책임하다는 등의 이유로는 결코 이들의 절망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누구나 삶의 한 지점에서 우연히 어떤 불행을 만나거나, 다른 선택을 한다면 얼마든 비슷한 결과가 나올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그렇다면 과연 이것은 개인의 문제일까요?
오늘 레터의 내용과 엮어서 생각해보며 이 영상을 볼 때, 역시 눈에 띈 부분은 '혼자'라는 키워드였습니다. 실은 경제적인 상황에 대한 압박도 큰 원인이긴 하지만, 그보다도 유승규씨는 '고립' 그 자체에도 상황을 벗어날 수 없게 만드는 요소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22대 총선, 역대급 선거 ‘그럼에도 정치’
독서시간: 약 14분 / 글자수: 약 6800자
🖍글 속 한 문장
* 이번 총선은 비례대표 의석이 역대급으로 줄어든 선거입니다. '비례대표용 위성정당'이라는 꼼수도 다시 등장했습니다.
* 이번 총선에서는 '막말'이 역대급으로 많이 들렸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유권자들의 피로도가 높아지고 있어요.
* 선거에서 의제가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습니다. 역대급 정책·의제 실종 선거라는 우려가 큽니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경향신문 뉴스레터 '점선면'팀이 이번 총선을 앞두고 주목할 만한 사실, 맥락 등을 깊고 알차게 다룬 글입니다.
글 속 한문장에 인용한 부분은, 이번 22대 총선의 가장 큰 특징 세 가지를 꼽은 것이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선거에 관심을 기울여야 겠죠.
다만 오늘 레터의 내용을 두고 곰곰 생각해보면, 결국 우리가 더 많은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하기 위해서는 일상에서 어떻게 우리가 더 모이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고민해가야 할 것입니다. 그게 결코 정치와도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닐 테고요.
투덜거리는 사람들을 주의하라
독서시간: 약 7분 / 글자수: 약 3100자
🖍글 속 한 문장
“지체 높은 귀족이 지나갈 때 현명한 농부는 고개 숙여 절한 다음, 소리 없이 방귀를 뀐다.”(에티오피아 속담) “현명한 사람을 잡으려면 바보처럼 굴어야 한다.”(자메이카 노예들의 속담)[...]체제를 정면으로 들이받는 힘 없는 사람들의 거센 저항이라기보다는 지배자의 등잔 밑에서 벌이는 피지배자들의 은근하고 끈질긴 위반과 선 넘기, 그리고 일상의 희비극적 장면에 강한 정치적 의미를 부여한다. 미시정치와 거시정치가 결코 동떨어져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오늘 레터에서 다룬 책 <은닉 대본>의 서평입니다. 전체적인 내용을 참고하고 싶으신 분들의 일독을 권합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책이 있고, 어떤 책들은 ‘굳이’ 오늘날의 차원으로 끌고와 무리해서 해석하지 않고 그 자체로 읽어도 좋겠습니다만. 이 책은 왠지 모르게 자꾸 오늘날의 상황에 적용하여 읽으려고 시도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오늘날엔 '진심으로(?) 투덜거리는' 사람조차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저도 잘 투덜거리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은닉 대본>을 읽어보면, 단지 공동체가 ‘있다’고 해서 결코 반항하는 게 쉬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그들 몫의 위험을 짊어지고 저항을 했던 것이죠.
청년 담론 실종 사건
독서시간: 약 6분 / 글자수: 약 3200자
🖍글 속 한 문장
“당사자들이[...]대안적인 청년 담론을 구성하는 일에 현재까지는 실패하고 있다는 점도 지적해야 할 것 같다. 반값등록금, 헬조선, 페미니즘, 공정성, 전세사기와 주거대책 등 가능성을 보여준 의제들이 있었지만, 충분한 대중적 ‘화력’을 얻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 그러나, 청년 시간은 온다. 역사는 흐른다는 아주 단순한 사실 덕분이다. 청년의 시간은 그들이 이제 더는 청년이 아니게 됐을 때 찾아올 것이다. 실종돼버린 것만 같은 청년 담론을 붙잡고 계속 이야기해야 하는 것은, 결국 그 미래의 시간을 준비하기 위함이다. 지금 당장 무엇이 크게 바뀌지 않아 답답할지라도, 우리(현재의 청년)가 만들어가고 싶은 세계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하고 다듬어가야만 우리에게 올 시간을 후회 없이 잘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청년팔이 사회>를 쓴 김선기 연구원이 대학신문에 기고한 칼럼입니다. 22대 총선에서 청년 담론이 실종된 상황을 짚고, 그 원인과 해결책까지 두루 깊게 살펴보고 있는 글입니다.
실은 선거에서 진정한 '청년 담론'이 실종되었다는 이야기는 꽤 오래 전부터 지속되어온 이야기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요.
그러나 저자는 ‘청년의 시간은 온다’고 선언합니다. 우리 몫의 정치는 (너무 멀지 않은 미래에 도래할) 어떤 모습일지에 대해 적극적으로 상상해가야 할 것입니다.
대자보를 쓴 청년들에 대한 기사도 함께 읽어보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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